20130403 경주벚꽃 탐방
1. 여행일 : 2013.4.3(수)
2. 장소 :
∘ 경주 보문호:경주시 신평동-호텔지구 건너편
∘ 첨성대-계림-반월성-한바퀴
∘ 김유신장군 묘-냄새만 맡고 드라이브 함
∘ 안압지 야경-한바퀴
3. 소개/볼거리 :
∘경주 보문단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국제적인 관광단지. 아시아 3대 유적으로 지정된 경주(1979, 유네스코)의 보문호(普門湖)를 중심으로 약 1,033 ha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세계은행의 2500만 달러 차관을 포함한 총 600억 원을 투입하여 1974년부터 개발에 착수, 1979년 4월에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개장되었다. 충분한 숙박과 다양한 위락시설을 제공함으로써 경주를 명실공히 종합적인 관광휴양지로 개발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주요시설로는 각종 국내외 회의와 대규모 행사를 유치할 수 있는 국제회의장인 관광센터(연면적 5,950㎡. 지하 1층 지상 3층, 5개 국어 동시통역실 완비), 골프장(18홀, 198ha), 각종토산품 및 관광기념품을 판매하는 종합상가, 특급호텔, 콘도미니엄, 놀이공원 등이 있다.
∘ 첨성대-계림-반월성
∘ 첨성대-신라시대의 천문대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하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단에서 제20단까지와 제25단에서 제26단까지의 두 곳에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이 걸쳐 있는데 그 양끝이 밖으로 나가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半圓)에는 판석(板石)이 있고, 맞은편에는 판목(板木)을 놓았던 곳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판석은 길이 156cm, 너비 60cm, 두께 24cm이다.
꼭대기에는 정자석(井字石)이 2단으로 짜여 있는데, 그 위에 관측기구를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혼천의(渾天儀)와 같은 관측기구를 정상에 설치하고 춘분 ·추분 ·동지 ·하지 등의 24절기를 별을 통하여 측정하였고, 정자석을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계림
경주시 교동-전설의 숲
반월성 옛 터를 따라 산책하듯 따라가면 느티나무 우거진 작은 숲을 만나게 된다. 무엇인가를 감추듯 자리하는 숲은 신라 탄생의 역사를 간직하는 비밀스러운 장소다. 신라의 시조로 알려지는 박, 석, 김의 세 성(姓) 중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담겨 있는 이곳은 계림이다. 흰빛 닭 울음 소리로 찾아간 숲 속에서 발견한 금궤 안에서 태어났다는 아이는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어 그의 후손이 신라의 13대 미추왕이 되었다.
신라 지역으로 새롭게 유입된 신진 세력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설화로 언덕 위를 가득 채우는 울창한 숲과 사당은 천 년의 전설을 실제인듯 느끼게 한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늦은 시간 신비한 조명으로 더욱 생동감 있는 계림을 찾아 옛이야기를 상상해보자. 화사한 낮보다 더욱 이색적인 숲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 반월성-경주 월성[ 慶州 月城 ]
경북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에 있는 101년(파사왕 22)에 축조한 신라 때의 성. 조선시대부터 반월성이라고 불렀다.
사적 제16호.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위가 1,023보(步)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290년(유례왕 7)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왕 9)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월성을 중심으로 한 궁성의 문은 남문(南門) ·귀정문(歸正門) ·북문(北門)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 ·임해문(臨海門) 등이 있고, 누각으로는 월산루(月山樓) ·망덕루(望德樓) ·명학루(鳴鶴樓) ·고루(鼓樓) 등이 있다. 또 관청으로는 남당(南堂) ·조원전(朝元殿) ·숭례전(崇禮殿) ·평의전(平議殿) ·좌사록관(左司祿館) ·우사록관(右司祿館) ·영각성(玲閣省) ·월정당(月正堂) 등이 있다.
왕궁으로는 내성(內省) ·임해전(臨海殿) ·안압지(雁鴨池) ·동궁(東宮) ·동궁만수방(東宮萬壽房) ·영창궁(永昌宮) ·영명궁(永明宮) ·월지궁(月池宮) ·내황전(內黃殿) ·내전(內殿)·내정(內庭) 등이 있다. 영명궁은 태후의 궁이었고 월지궁은 왕태자의 궁이었다. 천존고(天存庫)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의 전설과 관계가 있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있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월성터[月城址]는 원래 충신인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는데, BC 19년(박혁거세 39) 석탈해(昔脫解)가 금성(金城)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南解王)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다.
∘ 김유신장군 묘
김유신묘사적 제21호. 경북 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묘.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21호로 지적되었다. 674년(문무왕 14) 축조되었으며 넓이는 1만 4143㎡이다. 신라의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왔으며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으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守墓)하는 백성을 배정해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음을 보아 그 무덤의 양식이 왕릉이나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흥덕왕(興德王) 대에 이르러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봉하였다.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十二方位) 주석(柱石)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경주 왕릉에는 몇 군데 지신상(支神像) 조각이 보이나 조각의 우수함이나 상의 거대함에 있어 이 묘를 따를 수 없다.
∘ 안압지
안압지경북 경주시 인교동에 있는 신라 때의 연못.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인접하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護岸工事)는 정교하고 도수로(導水路)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瓦塼類)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미(優美)한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年號銘)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예술품으로서 판상(板狀)의 금동여래삼존상(金銅如來三尊像)과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등의 우수한 작품이 있고, 유존(遺存)하는 예가 드문 목조의 배, 건축 부재, 목간(木簡) 등의 채취와 그 보존에 성공한 일은 귀중한 공적이다.
'국내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영사[ 佛影寺 ] (0) | 2013.05.03 |
---|---|
20130403 경주벚꽃 탐방 -2 (0) | 2013.04.10 |
98. 충남 공주 여행-4 (0) | 2013.01.03 |
98. 충남 공주 여행-3 (0) | 2013.01.03 |
98. 충남 공주 여행-2 (0) | 2013.01.03 |